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.
1830년 중국으로 향하는 류구왕국 사절단 선대(船隊).7~9세기 일본 견당사(遣唐使)의 항로 변천에서 알아볼 수 있다.
상당수 류구인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뿐이고 류구국왕은 류큐번주를 거쳐 일본국 귀족에 편입되었다.1879년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할 때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.애초에는 대륙의 해안지대까지 자리 잡고 있다가 대륙문명의 압력이 강해지는 데 따라 밀려난 것이다.
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·중산·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(三姓穴)이 떠오른다.『수서(隋書)』(636)에 나오는 ‘류구(流求)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.
11~15세기 중에 규슈 영주들의 확장 노력이 미친 것이 사쓰난의 범위였다.
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.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.
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.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.
7~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~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.타이완이 머물러 있던 해양문명권을 중국에서는 ‘남도(南島) 문명이라 부른다.